[이승재 칼럼] ‘0승 8패’ 투수…MLB 40대 '금강불괴' 투혼

1983년 2월 20일생, 42세의 투수가 세계 최고의 야구 선수들이 모두 모인 메이저리그 경기 마운드에 오르고 있다. 올 시즌 성적은 0승 8패. 그럼에도 팀은 그를 믿고 다시 선발투수로 기용했다.
18일 토론토 로저스 센터.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베테랑 투수 저스틴 벌랜더는 그러나 또다시 마운드에서 물러났다. 2⅔이닝 9피안타 4실점, 삼진 0. 시즌 16번째 선발 등판이자, 또 한 번의 패전. 자이언츠는 0-4로 무릎을 꿇었고, 벌랜더는 2025시즌 0승 8패라는 암울한 성적을 기록하게 됐다. 올 시즌 그는 평균자책점 4.99, WHIP 1.51. ESPN 통계에 따르면 79.1이닝 동안 67개의 탈삼진과 28개의 볼넷, 92개의 안타를 내줬다.
전성기 벌랜더와는 거리가 먼 성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JV, 저스틴 벌랜더를 여전히 ‘레전드’라 부른다. 왜냐하면 숫자가 그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초콜릿 우유와 냅킨 계약서
벌랜더의 전설은 고등학교 시절 한 컵의 초콜릿 우유에서 시작됐다.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벌랜더는 50센트짜리 초콜릿 우유를 너무 먹고 싶었지만 지갑엔 돈이 없었다. 친구 대니얼 힉스에게 "내가 나중에 메이저리그 계약하면 계약금의 0.1%를 줄 테니 지금 50센트만 빌려달라"고 말했다. 힉스는 웃으며 근처에 있던 냅킨을 찢어 계약서를 작성했고, 둘은 장난처럼 악수로 거래를 마쳤다.
그리고 2004년. 벌랜더는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2번으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 지명되며 메이저리그 꿈의 문을 열었다. 계약금은 무려 312만 달러. 일반적인 선수들이 에이전트와 협상하는 것과 달리, 벌랜더의 대리인은 다름 아닌 그의 아버지 리차드 벌랜더였다. AT&T 통신회사의 전선 기술자이자 노조위원장이었던 아버지는 타고난 협상력으로 팀과의 협상에서 밀리지 않았고, 결국 ‘에이전트의 황제’ 스캇 보라스가 대리하던 제러드 위버보다 높은 계약금을 이끌어냈다.
그때 친구 힉스는 ‘냅킨 계약서’를 들고 벌랜더 앞에 나타났다. 모두가 웃었고, 벌랜더는 그 자리에서 약속을 지켰다. 정확히 계약금의 0.1%, 3천 달러를 힉스에게 건넸다. “그 초콜릿 우유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말하면서.
◆101마일 파이어볼러, 전설의 전조
벌랜더는 메이저리그 데뷔 전부터 ‘101마일 파이어볼러’로 주목받았다. 2005년 더블A에서 7번 선발 등판해 ERA 0.28을 기록하며 리그를 지배했다. 결국 ‘마이너리그 올해의 투수상’을 거머쥐고 타이거스의 핵심 자원으로 메이저리그에 빠르게 승격됐다.
그리고 그 해 7월, 벌랜더는 마침내 디트로이트 유니폼을 입고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섰다. 이후 20년 동안 수술 등 부상 없이 건강했던 시즌에는 단 한 번도 존재감을 잃지 않았다.
◆SF 이전 벌랜더, 숫자로 본 전설
통산 성적: 262승 154패, ERA 3.33, 3,483탈삼진
사이영상 3회 수상: 2011, 2019, 2022
월드시리즈 우승 2회: 2017, 2022 (휴스턴 애스트로스)
MVP 수상: 2011년
한 시즌 250이닝+250K(2011)
2011년 그는 24승 5패, ERA 2.40이라는 괴물 같은 시즌을 보내며 리그를 평정했고, 사이영과 MVP를 동시에 거머쥐었다.
2022년, 39세의 나이로 토미존 수술 복귀 후 1.75의 ERA를 기록하며 또 다시 사이영을 수상했다. 이 모든 것은 단순한 재능의 결과가 아니다. 타고난 노력과 야구에 대한 애정이 만든 성취였다.
◆‘이정후의 멘토’, 벌랜더
2025년 벌랜더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고 다시 도전에 나섰다. 그곳엔 한국 야구의 희망 이정후가 있었다. 이정후는 메이저리그에 입성하자마자 리그 평균을 상회하는 출루율과 타율로 주목받았고, 자이언츠 팬들의 새로운 스타가 됐다.
투수인 저스틴 벌랜더와 야수인 이정후는 우정이 크지는 않지만 특별한 단순한 팀 동료 그 이상임은 분명하다. 경기 중 벌랜더가 이정후의 다이빙 캐치나 장타에 진심으로 환호하는 장면은 자주 포착된다. 특히 홈런이나 수비 호수비 순간, 벌랜더는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며 주먹을 들어 환호하거나 벤치에서 먼저 박수를 보내곤 한다. 이런 장면들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일부 팬들은 “이정후의 홈런을 가장 크게 반응해주는 선수가 벌랜더”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실제로 벌랜더는 시즌 초 팀 공식 인터뷰에서 이정후를 언급하며 기대감을 드러낸 바 있다. 인터뷰 중 그가 “김(KIM)이 돌아오고…”라고 이정후의 이름을 착각해 말한 장면이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이정후가 팀 내 주요 전력이라는 인식을 베테랑 벌랜더조차 자연스럽게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정후에게 벌랜더는 단순한 선배를 넘어 메이저리그라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경험과 방향을 제시해주는 멘토다. 반대로 벌랜더 역시 이정후의 꾸준한 활약과 그라운드에서의 헌신을 통해 팀의 에너지를 되찾고 있다.

◆가족이라는 든든한 뿌리
야구 인생이 고단할수록 벌랜더는 가족으로부터 위안을 얻는다. 2017년 슈퍼모델 케이트 업턴과 결혼했고, 2018년 딸 질리언이 태어났다. 케이트는 야구장을 직접 찾아 응원하며 SNS를 통해 벌랜더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다.
벌랜더는 종종 "내가 마운드에 설 수 있는 건,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마운드에서 맞는 아픔보다도, 벤치에서 듣는 딸의 응원 소리가 더 크다는 그는, 진짜 '패밀리 맨'이자 '야구 선수'다.

◆무승 8패, 그러나 위대한 투수의 진짜 시간은 지금부터
숫자는 엄격하다. 0승 8패는 화려한 커리어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하지만 숫자는 전설을 규정할 수 없다.
그는 이미 팔꿈치 수술을 이겨내고, 부활했고, 또 한 번 부활했다. 그리고 지금, 42세의 나이로 여전히 매주 공을 던지고 있다. 그는 자신에게, 그리고 후배들에게 말한다.
“실패했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다시 던질 수 있다면, 기회는 남아 있는 거다.”
야구는 실패의 경기다. 그리고 그 안에서 포기하지 않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벌랜더는 지금 그 말을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의 관중은 여전히 벌랜더가 마운드에 오를 때 기립 박수를 보낸다. 이정후와 함께 뛰는 그의 모습은 세대를 뛰어넘는 야구의 가치를 말해준다.
그리고 전 세계 야구팬들은, 케이트 업턴과 질리언, 이정후와 자이언츠 동료들과 함께 벌랜더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다.
그는 아직 던지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 우리는 알고 있다. 그는 다시 승리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 '그레이트 벌랜더'로, '금강불괴(金剛不壞)'로 남아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