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 칼럼] 불가근(不可近) 불가원(不可遠)…부모-자식과 돈

“너희들에게 아버지 재산 안 준다. 모두 어머니에게 상속한다. 너희들은 어머니 앞으로 잘 모셔라”
명문대를 졸업하고 좋은 직업, 남부럽지 않은 직장에 다니는 30대 아들, 20대 딸 남매를 둔 아버지는 숨지기 직전 이런 유언을 했다.
서울에 작은 건물을 갖고 있는 그 아버지의 상속 선언에 남매는 그 어떤 토를 달지 않고 “예 알겠습니다. 걱정 마세요”라고 말할 뿐이었다.
이 가족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별 문제없이 잘 지내고 있다.
“자식과 재산은 따로 놀게 해야 오래 간다”는 말이 있다. 부모의 재산이 자식을 망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불가근(不可近) 불가원(不可遠), 너무 가까워도 멀어도 안 되는 게 바로 부모와 자식 간 돈 문제일 거다.
최근 검찰에 따르면 대구지검 형사2부(김성원 부장검사)는 21일 20대 여성을 사귀는 척하며 심리적으로 지배해 그 여성 부모의 현금 등 자산 100억원 상당을 받아낸 뒤 그 중 약 70억원을 빼돌린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로 A(20대)씨를 구속기소 했다.
또 그가 은닉한 범죄 수익 중 일부를 보관한 혐의(범죄수익은닉규제법 위반)로 공범 B(20대)씨는 불구속기소 했다.
A씨는 2023년 11월부터 최근까지 20대 여성 C씨에게 접근해 사귀는 척 속인 뒤 재력가인 C씨 부모가 보관 중이던 현찰과 부모 계좌에 있던 현금 자산 100억원 가량을 빼돌린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그는 이 중 약 70억원 상당을 자금 추적이 어려운 상품권으로 전환한 뒤, 이를 다시 개인 상품권 업자에게 되팔아 현금화하고 숨겼다. 일부는 B씨에게 넘긴 것으로 조사됐다.
검찰은 수사 과정에 확보한 압수물인 29억원 상당의 현금과 상품권, 명품 시계와 가방 등에 가압류를 신청했다.
부모 자식 간의 끈끈한 정, 사랑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다. 하지만 부모와 성인 자식 간 경제적인 의존성에 따라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위의 사건이 전형적인 ‘로맨스 스캠’(사랑을 빙자한 금전 갈취)과 사뭇 다른 이유는, 그 피해 금액이 피해자 부모의 돈이라는 거다.
자녀가 어려서부터 부모의 경제력에 익숙해지면,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려는 의지보다는 '언젠가 부모님이 도와주시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에 젖기 쉽다. 이는 곧 독립심 부족으로 이어져 사회생활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거나, 심지어 이번 사건처럼 부모의 재산을 빼돌리는 범죄에 이용되거나 공범이 될 위험성을 높인다.
경제적으로 부모에게 과도하게 의존하는 자녀는 스스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당하고, 작은 어려움에도 쉽게 좌절하는 나약한 존재로 전락할 수 있다.
부모가 해줄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은 돈 뿐 아니라 자녀가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도록 돕는 데 있는 것이다.
보이스피싱이나 단순 사기 수법과는 달리, 로맨스 스캠은 피해자의 감정을 깊숙이 파고들어 장기간에 걸쳐 신뢰를 쌓은 후, 결정적인 순간에 거액을 갈취하는 특징을 보인다.
특히 자녀에 대한 걱정과 사랑이 깊은 부모의 경우, 자녀를 사칭하거나 위기에 처한 상황을 연출하는 범죄자들의 술책에 속아 넘어가기 쉽다.
이번 100억 원 로맨스 스캠 사건은 우리 사회에 '부모의 돈과 자녀의 분리'라는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부모-자식은 가까워야 하지만 그 사이에 돈이 개입하면 바로 ‘불가근-불가원’ 문구를 적용해야 한다.
부모는 자녀에게 올바른 경제관념을 심어주는 ‘가정교육’이 필요할 뿐 아니라 자녀 역시 부모의 헌신과 노력을 존중하고, 경제적으로 독립된 주체로서 성장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액수와 상관없이 부모와 자녀 사이에 돈 문제는 사랑과 믿음의 영역이 아니라 냉정하고 철저한 관리의 영역이어야 한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자산이 좀 있는 집이라면 자녀가 성인이 되자마자 자산관리를 전문가에게 맡기거나 신탁을 설정하는 게 흔하다.
부모가 아이의 계좌를 들락거리며 "이번 달 생활비는 얼마쯤 써야 하지?"라고 고민할 필요 없이, 전문가들이 알아서 적절한 금액만 관리해 준다. 서로가 스트레스를 받을 일도 없고, 돈 문제로 가족 간 얼굴 붉힐 일도 없다. 더 좋은 건 돈 빼돌릴 일 자체가 없다는 점이다. 신탁은 돈 문제로부터 가족을 자유롭게 해주는 마법과도 같다.
부모의 돈을 자녀가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게 하는 건 마치 냉장고 안에 특등급 한우와 케이크를 넣어두고 다이어트 중인 사람에게 "먹지 마"라고 당부하는 것과 같다.
돈 앞에서는 가족도 남이 될 수 있다. 물론 가족 간 믿음과 사랑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다만 부모-자식 간 돈 문제는 오히려 서로를 힘들게 할 수 있다는 걸, 자칫 관계를 파탄 나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