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 칼럼] 부정선거와 디지털 K-민주주의

“입주민님 투표에 참여해주세요”
‘아파트 아이’라는 업체가 1년에 두어 번 보내는 카카오톡 메시지다.
이 회사 주요 업무 중 하나는 아파트 입주민 전체의 의견을 듣는 ‘직접 투표 플랫폼’ 운영이다. 아파트 외벽 디자인, 관리 규약 개정, 엘리베이터 공사 등등 모든 주민의 의견을 물어볼 일이 있을 때 카카오톡으로 1세대 1표, 투표를 가능하게 한다.
이런 디지털 플랫폼을 통한 전국민 직접 투표, K-민주주의를 꿈꿨다. 아네테 시민들이 공론장에 모여 나랏 일을 결정하는 것처럼 국민과 정치인의 ‘직거래’, 직통 민주주의를 꿈꿨다.
카카오톡, 유튜브, 인스타그램, X(구 트위터),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는 각종 정치-사회 이슈를 놓고 국민-정치인의 직거래를 활성화시켜 왔다.
세계 최고 수준의 정보통신기술(ICT) 국가인 대한민국이 기존의 직접민주주의 개념을 뛰어넘는 쌍방향 직접소통, ‘직통 민주주의’를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적지 않았다.
정치권, 정부가 국민을 상대로 진영 논리와 국가 정책에 대해 일방적으로 홍보하는 게 아니라 중간 매개 없이 국민-국가 운영자들이 직접 당사자 간 거래를 한다. 아파트 입주민 투표처럼 선거를 치른다. 또 정책 입안-공론화-최종 확정 각 과정에서 양자가 서로 선순환적인 피드백을 주고받는 방식이다. 직통 민주주의다.
한국은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과 스마트폰 사용률에서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블록체인, 클라우드 컴퓨팅 등 첨단 기술을 활용하면 안전하고 투명한 전자투표와 정책 소통 플랫폼을 구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게다가 많은 한국 국민은 한 명 한 명 모두 정치 전문가 혹은 평론가다. 높은 정치적 관심과 적극적인 참여 의식을 보인다. 디지털 민주주의 플랫폼이 활성화되면, 즉 내 의견이 곧바로 선거와 정책에 반영되는 시스템이 있으면 폭발적으로 참여할 거란 말이다. 실제로 문재인 정부 당시 국민청원 게시판 등에서 나타나지 않았는가.
동유럽의 강소국이자 ‘디지털 국가’인 에스토니아를 보면 더 선명해진다. 에스토니아는 세계 최초의 전자투표 국가다. 2005년 지방선거에서 전자투표(e-Voting)를 도입했고, 2007년 총선에서 세계 최초로 국가 단위 선거에 인터넷 투표를 적용했다. 모든 에스토니아 국민은 전자 ID 카드를 통해 본인 확인 및 투표를 진행한다. 물론 전자투표만 하는 게 아니라 현장 투표도 병행한다. 2019년 총선에서는 전체 투표자의 44%가 전자투표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디지털 기술은 민주주의를 한 단계 더 진화시킬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한 디지털 직접 민주주의는 전통적인 대의민주주의가 가진 한계를 극복하고, 더 투명하고 참여적인 정치를 가능하게 한다. 특히, 전자투표는 국민들의 참여를 획기적으로 높이고, 정책 결정 과정을 실질적으로 민주화할 수 있는 중요한 도구다.
블록체인 기반 전자투표 시스템은 투표 데이터의 위·변조를 원천적으로 방지하며, 익명성과 투명성을 동시에 보장한다.
국민들은 신뢰할 수 있는 환경에서 정책과 법안에 대해 직접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기술이라도 결국은 사람이 문제다. 사람의 신뢰를 따라 가지 못하면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라는 걸 절감하는 요즘이다.
독버섯처럼 끊임없이 나고 자랐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는 부정선거 논란 때문이다. 그 음모론의 내용을 여기에 일일이 적시하는 것은 에너지 낭비다.
법원은 지난 몇 년 동안 여러 차례 수개표와 투표용지 분류기를 병행하는 현재의 개표 방식이 조작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고 판단했다. 투개표에 참여하는 수십만 명의 공무원, 각 정당 참관인이 모든 개표 과정을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사실상의 수개표를 통해 투명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선관위는 목이 쉬도록 말한다.
그래도 내란죄 우두머리 피고인 윤석열 대통령과 그의 추종자들은 부정선거 음모론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윤석열이 임명한 선관위 사무총장은 서울대 법대 동기, 친구다. 김용빈 선관위 사무총장은 "부정선거 주장은 실질적 근거가 없는 단순한 음모론"이라고 단언했다.
그럼에도 부정선거 논란은 단순한 의혹에서 끝나지 않고, 선거 제도 전반에 대한 국민적 불신으로 이어졌다. 이는 디지털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중요한 전제 조건인 사회적 신뢰가 부족하다는 의미다.
대한민국은 ICT 강국으로서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K-민주주의를 충분히 할 수 있는 나라다. 그러나 디지털 민주주의는 기술이 아니라 신뢰에 달렸다는 걸 깨닫게 된다.
부정선거 논란과 그로 인한 사회적 불신은 디지털 민주주의의 길을 막고 있다. 기술적 역량은 충분하지만, 국민적 신뢰와 사회적 합의가 부족한 상황에서는 디지털 혁신이 오히려 갈등의 씨앗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대한민국의 디지털 민주주의 실현, 직통 민주주의 꿈을 접을 수는 없다. 대신 온라인 정책 제안 플랫폼, 디지털 공청회 시스템, 시민 참여형 예산 플랫폼 등 소규모 프로젝트부터 시작하여 국민의 ‘디지털 신뢰’를 쌓아나가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이다.
현재의 부정선거 논란과 사회적 갈등 속에서 에스토니아와 같은 전면적인 전자투표 시스템이나 광범위한 디지털 민주주의 체제를 도입하는 것은 '아직'이다. 그러나 더 투명하고, 더 직접적이며, 더 효율적인 디지털 민주주의의 큰 물결을 거스를 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