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가명 처리한 개인정보 활용 OK"

대법원이 SK텔레콤 가입자들이 제기한 ‘가명처리된 개인정보에 대한 처리 중단 청구’ 소송에서 통신사 손을 들어주며, "가명처리 정보는 개인정보보호법상 처리중단 요구 대상이 아니"라는 최종 판단을 내렸다. 이번 판결은 향후 데이터 기반 신산업 분야에서 기업들의 개인정보 활용 범위를 넓히는 기폭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1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1부(주심 서경환 대법관)는 최근 A씨 등 SKT 가입자 5명이 회사를 상대로 낸 개인정보 처리 정지 청구 소송에서 원고 승소로 판단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이는 2021년 2월 가입자들이 소송을 제기한 지 3년 반 만에 대법원이 처음 내린 판단이다.
이번 사건의 핵심은 SK텔레콤이 수집한 가입자 정보를 ‘가명처리’한 뒤 추가 동의 없이 자체 분석이나 외부 제공 등에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 있었다.
원고들은 이를 두고 정보주체로서 자신의 개인정보에 대해 처리중단을 요구할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시민단체 참여연대 등은 2020년부터 통신사들이 개인정보를 가명처리한 뒤 소비자 동의 없이 상업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사실상 개인정보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법적 쟁점화에 나섰다.
가명처리란 개인정보 일부를 삭제하거나 대체해, 해당 정보만으로는 누구인지 식별할 수 없도록 만드는 조치를 말한다. 예를 들어 이름, 생년월일, 전화번호 등 직접 식별 가능한 정보를 익명화하거나 비식별 값으로 바꾸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개인정보보호법 제28조의2는 이런 가명정보를 기업들이 정보주체 동의 없이 활용하거나 제3자에게 제공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1심과 2심 재판부는 원고들의 손을 들어줬다. 개인정보보호법 제37조 제1항이 “정보주체는 개인정보 처리자에게 자신의 개인정보 처리 정지를 요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가명처리도 개인정보 처리의 일종이며 따라서 그 처리 중단을 요구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대법원 판단은 달랐다. 재판부는 가명처리가 개인정보 처리와는 명확히 구별된다고 선을 그었다. 대법원은 “가명처리는 개인정보를 식별할 수 없게 만드는 방식으로, 정보주체에게 사생활 침해 등의 위험을 발생시킬 수 있는 개인정보 처리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행위”라고 밝혔다. 따라서 개인정보보호법상 처리중단 요구의 대상이 아니며, 기업이 가명처리를 통해 데이터를 활용하는 것은 법의 취지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결론이다.
이 같은 판단의 배경에는 데이터 기반 신산업의 육성이라는 정책 방향이 깔려 있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데이터 관련 신산업 육성이 국가적 과제로 대두되고, 인공지능, 클라우드, 사물인터넷 등 기술 발전에 따른 데이터 활용 수요가 폭증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언급했다. 이어 “가명정보 조항은 데이터 이용 활성화를 위해 입법된 것으로, 가명처리를 개인정보 처리에 포함시켜 중단 요구의 대상이 되도록 해석하는 것은 입법 취지를 무력화하는 결과가 된다”고 설명했다.
대법원은 또 가명처리와 개인정보 파기 또한 개념적으로 다르다고 강조했다. 정보주체가 자신의 개인정보를 완전히 없애달라고 요청하는 파기 요구와 달리, 가명처리는 그 자체가 정보 활용을 전제로 한 처리 방식이기 때문에 처리 중단을 전제로 하는 보호 조치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대법원의 입장은 향후 데이터 기반 산업 전반에 걸쳐 상당한 파장을 불러올 것으로 보인다. 통신사뿐 아니라 병원, 금융사, 플랫폼 기업 등 방대한 데이터를 보유한 민간 기업들이 법적 리스크 없이 가명처리를 통해 수집한 정보를 분석하거나 상업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근거가 생겼기 때문이다. 특히 대기업 중심의 플랫폼 사업자들은 이 판결을 계기로 데이터 상품화 전략을 더욱 가속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 같은 판결이 정보주체의 권리를 지나치게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시민단체들은 “가명처리된 정보라 하더라도 해당 정보가 나에 관한 것이라면 활용 방식에 대해 정보를 제공받고 중단을 요청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헌법소원이나 입법 청원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판결은 정보주체의 권리 보호와 데이터 산업 활성화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이 얼마나 복잡한 문제인지를 보여준다. 개인정보보호법이 정한 ‘가명정보’는 본래 정보주체의 사생활 침해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도입된 제도지만, 기업의 데이터 활용 수단으로 전용되면서 또 다른 법적 충돌의 불씨가 되고 있다.
이에 따라 향후 국회나 정부 차원의 추가 입법이나 가이드라인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힘을 얻고 있다.
한편 이번 판결을 계기로 SK텔레콤뿐 아니라 다른 통신사들도 가명처리된 고객 데이터를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할 가능성이 커졌다. 산업계는 대법원 판단이 데이터 경제에 숨통을 틔우는 긍정적 계기가 될 것이라고 평가하는 분위기다.
결론적으로 이번 판결은 가명처리가 단순한 기술적 처리 절차가 아니라, 데이터 시대의 법적 기준과 윤리 기준이 충돌하는 지점이라는 것을 다시금 일깨우고 있다. 데이터는 새로운 자산이자 공공재라는 인식 속에서, 누구의 권리가 더 우선되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앞으로도 반복될 사회적 과제가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