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 칼럼] 지배하지만 책임지지 않는다

"지배하지만 책임은 없다"
2025년 4월 21일 터진 SK텔레콤의 유심 해킹 사태는 대한민국 재벌 체제의 구조적 병폐를 여실히 드러냈다.
유심 정보 유출 2,300만 건, 이틀 만에 7만 명의 가입자 이탈, 주가 8.8% 하락으로 1조 원 이상의 시가총액이 증발했음에도 SK그룹 총수 최태원 회장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SK텔레콤이 전 가입자 대상 유심 무상 교체를 발표했으나, 보유 재고는 100만 개에 불과했고 5월 말까지 추가 확보 가능한 물량도 500만 개에 그쳐 가입자 70% 이상이 최소 석 달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
4월말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는 최태원 회장을 청문회 증인으로 채택했으나, 그는 '법적 책임이 없다'는 논리로 불출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노소영 관장과의 이혼 항소심에서는 1조 3,080억 원의 재산분할 판결에 500쪽에 달하는 상고이유서를 대법원에 제출하며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최 회장은 왜 SKT 사태에서 사라진 걸까.
그가 CEO인 SK(주)는 SK그룹의 지주회사로, 자사 홈페이지에서 '지속 가능한 미래를 만드는 투자전문회사'라고 소개한다.
SK(주)는 SK텔레콤의 지분 26.8%를 보유한 최대주주이며, SK(주)의 최대주주는 17.5% 지분을 가진 최태원 회장 개인이다.
따라서 최 회장은 SKT 사태에서 직접적으로 연관돼 있지 않다는 게 SK측 주장이다.
최 회장은 그룹을 지배하는 지주회사 대표이자 회장이지만, SKT는 대표이사가 최종 결정권자이자 책임자라는 논리다. 법적으론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SK그룹의 지배자, 오너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번 사태에서 모든 공식적 책임은 CEO인 유영상 대표가 도맡고 있다. 이 과정에서 기술 대응은 보안팀에게, 해명은 고객센터에서 하고 있다. 소비자와 직접 맞닿는 현장 대응은 SKT 대리점과 그 직원들이 '개고생'하고 있다.
SKT사태 와중에 '사라진' 최태원 회장은 대한민국 재벌사에 '총수는 지배하지만 책임지지 않는다'는 기록을 떠올리게 한다.
재벌 총수 개인의 사법리스크와 사생활, 상속 문제가 국가 경제의 리스크로 확대되고 있다. SKT 해킹 사태로 인한 직접적 비용은 유심 교체 비용 920억 원, 예상 과징금 수백억 원, 집단소송과 금융사고 등 간접 손실 최대 2,000억 원을 합해 최소 3,000억 원에 달할 것으로 예측되나, 최 회장은 "내 책임은 아니다"라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UN SDGs(지속가능발전목표) 고위급 회의에서 ESG 경영을 강조하고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으로서 기후 대응을 역설했던 최태원 회장이 자사 핵심 계열사의 국민 정보 유출 사태 앞에서 침묵함하고 있다.
그의 도의적인 책임과 진정성이 와르르 무너졌다.
이번 사태는 기술적 해킹이기도 하지만 구조적 리더십 부재가 초래한 시스템 붕괴이기도 하다. 나아가 실질 지배자로 그룹 전반 경영에는 개입하면서도 책임에는 침묵하는 한국 재벌 체제의 실체를 보여준다.
대한상의 회장 자격으로 최 회장은 지난 4월 22일 국회에서 열린 ‘미래산업포럼’에서 기조연설을 통해 한국경제의 구조적 한계를 지적하고, 고정관념을 깨는 새로운 해법을 제시했다. 그는 일본과의 협력 확대, 고급 인재 유치, 지식재산권 중심의 ‘소프트머니’ 확대를 제안하며, 메가 샌드박스와 인센티브 기반의 사회문제 해결 시스템 등 민간 주도 혁신 전략을 강조했다.
SKT 사태가 표면화되기 직전이었다.
재벌 총수의 책임감이 기업의 위기와 국민의 피해로 직결되는 구조가 과연 정상인지, 총수 부재 시 그 공백을 누가 메울 수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SK텔레콤은 해킹당했지만, 대한민국은 신뢰를 도난당했으며, 이 경고를 무시한다면 다음 위기는 SKT를 넘어 한국 경제 전체로 확산되지 않을까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