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진 38세 은행원 …법원의 '산업재해' 인정 이유

“사람을 죽인 것은 고혈압, 당뇨가 아니라 일이었다.”
2012년 서울의 한 대형은행에 입사한 이후 10년 넘게 성실한 은행원으로 살아온 A씨(38)는 2023년 3월 어느 일요일 집 근처 골프 연습장 주차장 자신의 차 운전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사인은 급성 심근경색.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가장이자 은행원이었던 그의 죽음은 처음에는 고혈압, 당뇨 등 개인적인 질병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지 못한 유족이 제기한 소송으로 ‘과로와 스트레스’가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임이 밝혀졌다.
사망 이후 A씨의 유족은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 관련 유족급여 지급을 요구했으나 공단측이 이를 거부했다. 공단은 A씨의 사망 원인이 업무와 무관하기 때문에 산업재해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유족은 이를 법원으로 가져갔고, 법원은 공단측의 판단을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서울행정법원 행정7부(재판장 이주영 수석부장판사)는 최근 "과로와 업무 스트레스가 급성 심근경색을 유발하거나 악화시켰고 이는 사망으로 이어졌다"며 업무와 사망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했다.
◆실제 근무시간 증거 남겨야
법원이 이렇게 판단한 이유는 근로 시간 계산의 차이 때문. 법원은 A씨의 실제 노동 시간이 공단이 주장한 것보다 훨씬 길었다고 판단했다. 공단은 A씨의 업무용 PC 사용 기록을 토대로 주당 평균 46시간 24분 일했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주당 52시간 이상의 근무를 인정했다.
이처럼 법원과 공단측이 근무 시간에서 차이를 보인 이유는 은행의 까다로운 연장근로 승인 시스템 때문이었다. 많은 직원들이 공식적인 업무용 PC 기록에 남지 않는 방식으로 잔업을 처리했다. 즉 직원들은 정규 근무시간 외에 업무용 PC 연장사용 승인을 받는 것이 번거로울 뿐더러 주당 12시간 한도에서만 승인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외부망 및 개인 노트북 등으로 일을 했다.
A씨 역시 자택에서 늦은 밤까지 문서를 작성하는 등 비공식적인 근무 시간이 적지 않았다. 법원은 이처럼 공식적인 기록에 남지 않는 '보이지 않는 노동'을 산업재해의 중요한 요소로 인정한 것이다.
법원은 유족 등이 제출한 각종 근무와 관련한 증거물들을 상당 부분 채택했고, 이를 근거로 근로시간을 다시 계산했다.
◆은행업무, 지점장의 극심한 정신적 압박
이와 함께 판결 내용에 따르면 A씨는 사망 직전, 은행 내부에서도 스트레스가 가장 심한 업무로 알려진 기업여신 심사 및 신용 평가 업무를 새로 맡았다. 이 업무는 기업의 신용도, 사업성, 상환 능력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일이다. 만약 심사를 거절할 경우 영업점 직원과 지점장의 거센 항의와 심리적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사망 직전까지 A씨는 다섯 건의 여신 심사를 불승인했으며, 이는 실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재판부는 "해당 업무는 부실 여신 승인 시 직원 본인이 징계나 손해배상 책임을 질 수 있어 상시적인 긴장과 스트레스가 수반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근로복지공단은 A씨가 고혈압, 당뇨 등의 개인 질환을 앓고 있었다고 주장했으나, 법원은 A씨가 지난 10년간 심혈관계 질환으로 치료받은 적이 없다는 점을 들어 만성적인 과로와 직무 스트레스가 사망의 결정적 원인임을 명확히 했다.
◆우리도 겪을 수 있다
A씨의 유족은 "남편은 단 한 번도 일을 미뤄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며 "늘 가족보다 회사가 먼저였는데 결국 회사 때문에 우리 곁을 떠나야 했다"라고 말했다.
이번 사건은 A씨 개인의 죽음을 넘어, 대한민국 직장인들이 겪는 과중한 업무, 평가 압박, 그리고 보이지 않는 노동의 무게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번 판결은 수많은 직장인들에게 "당신의 고통은 정당하고 당신의 과로는 인정받아야 한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던진다. A씨의 죽음이 또 다른 희생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이 사건은 우리 사회 전체가 직장 문화와 노동 환경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