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기획] 대법원 "보증금 지키려면 살아라"
뉴스

[기획] 대법원 "보증금 지키려면 살아라"

이승재 기자
입력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아직도 전세 사기 등 주택 임대를 둘러싼 문제가 곳곳에서 심각하다.

 

최근 대법원이 임차인의 보증금 보호에 관련한 중대한 판결을 내렸다. 

 

지난 4월 대법원 민사2부(주심 권영준 대법관)는 임차인이 보증금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거주 상태(점유)'를 유지해야 한다는 판결(2024다326398)을 내렸다.

 

임차인이 주택에서 나간 후 임차권 등기를 하더라도 과거의 대항력(임차인이 제3자에게 임대차 사실을 주장할 수 있는 권리) 되살릴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사건의 시작은 20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A씨는 B씨 소유의 서울 주택을 보증금 9500만 원에 임차했고, 전입신고와 확정일자 등 모든 절차를 갖췄다. 이로써 A씨는 임대차 사실을 제3자에게 주장할 수 있는 '대항력'과 경매 상황에서 보증금을 우선적으로 받을 수 있는 '우선변제권'을 획득했다.

 

문제는 2018년 1월 B씨가 해당 주택에 6600만 원 규모의 근저당권을 설정하면서 시작됐다. 

 

임대차 계약이 종료된 후에도 B씨는 A씨에게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았다. 다행히 A씨는 서울보증보험의 임대차보증금 반환 보험에 가입되어 있어 보험금으로 손해를 일부 메울 수 있었다.

 

이후 서울보증보험은 A씨로부터 권리를 넘겨받아 2019년 4월 임차권 등기를 완료하고 B씨의 자산에 대해 강제경매를 신청했다. 해당 주택은 경매를 통해 제3자인 이씨에게 낙찰됐다. 

 

서울보증보험은 경매 배당금으로 약 1270만 원을 회수했지만, 여전히 남은 보증금과 지연손해금 약 8200만 원을 새 집주인인 이씨에게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보증보험의 주장은 "새 집주인인 이씨가 임대인의 지위를 승계했으니 그가 남은 보증금을 갚을 의무가 있다"는 것이었다. 

 

1심과 항소심은 이 주장에 손을 들어줬다. 하급심은 "피고가 임대인의 지위를 승계한 이상, 서울보증보험은 잔여 보증금을 받을 수 있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대법원의 판단은 정반대였다. 대법원은 "주택임대차보호법상 임차인의 대항력은 주택에 실제로 거주하고 주민등록을 마친 상태에서만 유지된다"고 강조했다. 이 사건에서 결정적인 것은 임차인 A씨가 2019년 4월 임차권 등기를 신청할 때 이미 해당 주택에서 나간 상태였다는 점이다. 

 

대법원은 "임차권 등기를 하면 새로운 시점부터 대항력과 우선변제권이 다시 생기지만, 이전에 사라진 대항력까지 되살리는 것은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대법원이 이렇게 하급심을 뒤집은 것은 명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임차인이 보증금을 돌려받기 위해서는 주택을 계속해서 점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설령 임차권 등기를 했더라도, 이미 집을 비운 뒤라면 법적 보호는 등기 시점부터만 시작된다. 이미 잃어버린 대항력은 회복되지 않는다.]

 

대법원은 또한 해당 주택을 경매로 낙찰받은 이씨는 '임차주택의 양수인'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는 이씨가 A씨의 옛 임대차 계약에 책임질 법적 지위에 있지 않다는 의미다. 결국 서울보증보험의 청구는 기각됐다.

 

이번 판결은 주택 임대차 관계에서 '실제 거주'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많은 임차인들이 보증금 반환이 지연될 때 임차권 등기를 하고 이사부터 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제 분명해졌다. 집을 비운 순간 대항력은 사라진다. 임차권 등기를 한다고 해도 과거의 보호는 되살아나지 않는다.

 

전세사기 피해자들 중 상당수가 이미 집을 비운 상태에서 권리를 주장하다가 법적 불이익을 받는 경우를 보면 이 판결 내용을 이해하기 쉽다.

 

임차인들은 이번 판결을 교훈 삼아 보증금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한 방법을 알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보증금을 돌려받기 전까지는 계속 집에 살아야 한다는 점이다. 전입신고만 유지한다고 안심해서는 안 되며, 실제 거주 여부가 핵심이다. 수도·전기·가스 요금 기록, 택배 수령 내역, 이웃의 증언 등이 실제 거주를 입증하는 간접 증거가 될 수 있다.

 

불가피하게 이사를 가야 하는 상황이라면, 먼저 임차권 등기를 신청하고 그 등기가 완료될 때까지는 거주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현명하다. 등기 이후에도 보증금 회수가 완전히 보장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법적 보호의 단절을 막을 수 있다.

 

주택임대차보호법이 제공하는 안전장치는 실제 거주를 전제로 한다. 어떤 서류나 절차도 '살고 있다'는 사실을 대체할 수 없다. 법은 점유하는 자에게 보호를 제공하고, 집을 비운 자에게는 보호를 거둬들인다. 주택임대차보호법이 보장하는 권리는 실제 거주를 통해 살아 숨 쉬고, 거주가 끊기면 법적 권리도 함께 소멸한다.

 

최근 전세사기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이번 대법원 판결은 임차인들에게 명확한 지침을 제시한다. 계약이 끝났다고 해서, 또는 집주인이 보증금을 주지 않는다고 해서 섣불리 집을 비우면 안 된다. 보증금을 지키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실제로 그 집에 살고 있는 것이다. 

 

전입신고, 확정일자, 임차권 등기 같은 법적 장치들은 모두 중요하지만, 그 전제조건은 '살고 있는가'이다.

이승재 기자
share-band
밴드
URL복사